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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한 모어와 드레츠키의 반박은 적절한가? 본문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 명제는 잘 알려져 있듯 데카르트가 주장한 지식과 진리의 징표인 확실성을 토대로 한 방법론적 회의 끝에 도달해 한 말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기초 믿음을 찾기 위해 다소 과장된 일명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을 제시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데카르트가 규정하는 진리와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에 대해 알아보고, 이와 관련한 모어(Moore)와 드레츠키(Dretske)의 논증이 성공적인 논박이라고 볼 수 있는지 검토해 본다.
데카르트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증거의 중요성을 굉장히 낮게 본 이성주의자 중 한 명이다.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한 고전역학의 확립 등 17세기에 일어난 과학 혁명을 겪은 데카르트는 과학적 지식의 상당 부분이 경험적인 관찰 같은 개연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토대론자인 그는 『성찰』에서 지식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확실성을 기초 믿음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기초 믿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을 찾으려 했고, 방법론적 회의인 확실성 테스트를 고안해냈다. (방법론적 회의란 말 그대로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역할에 한해서 회의론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확실성 테스트는 다음과 같다.
만일 H라는 가설이 가능하고, B라는 믿음이 H를 가정했을 때 거짓이라면, B는 확실하지 않고 의심되어야 한다. 만일 H를 가정했을 때 B라는 믿음이 거짓이 되는 가설 H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음 B는 확실하다.
데카르트는 많은 믿음들을 한 번에 의심할 수 있는 두 개의 가설을 제시하며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꿈 가설이다. ‘구운몽’같이 주인공들이 자신이 꿈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이 진짜 세계에서 일어난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몇몇 문학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설을 가정하면, 감각경험에 기초한 모든 믿음들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믿음들은 확실성을 갖지 못한다.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 근거 역시 대부분 감각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에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확실성 테스트에 의해 감각경험에 기초하는 모든 믿음들은 참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전능한 악마 가설이다. 어떤 전능한 악마가 있고, 이 사악한 악마가 우리의 정신을 조작해서 우리가 감각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이 악마의 간교한 농간에 불과하다는 가설이다. 예를 들어, 명백한 수학적 지식조차도 악마가 우리의 정신을 조작해 잘못 계산하거나 사고하게 만들어서 도출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악마 가설을 가정하게 되면, 수학적 진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확실성을 갖기 힘들어지고, 우리의 모든 믿음들의 토대인 감각과 이성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해 모어와 드레츠키는 인식적 닫힘 원리를 다루면서 확실성 테스트에 대한 해결책을 내세운다. 인식적 닫힘 원리란 다음과 같다.
S라는 사람이 p가 q를 함축(entail)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S가 q를 알지 못한다면, p도 알지 못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회의주의 논변이 도출된다.
나는 내 앞에 책상이 있다는 것(p)이 데카르트의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q)을 함축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데카르트의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나는 내 앞에 책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모어는 이러한 회의주의 논변을 인식적 닫힘 원리의 대우를 이용해서 반박한다. 즉, 모어는 닫힘 원리를 인정하면서, 내 앞에 책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로부터 데카르트의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p가 q를 함축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내가 p를 알고 있으므로 q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드레츠키는 인식적 닫힘 원리 자체가 틀렸음을 보임으로써 회의주의 논변에 반박한다. 드레츠키는 p에 대한 증거와 q에 대한 증거 사이의 낮은 관련성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원에서 얼룩말처럼 보이고 행동하는 동물들을 보고, ‘얼룩말’이라고 적혀 있는 팻말을 보면서 그 동물들이 얼룩말이라는 사실(p)을 알 수 있지만, 그 동물들이 노루가 아니라는 사실(q)에 대한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q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동물들이 노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면 팻말을 적은 스태프가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는 것, 이 동물원은 정직한 동물원이라는 것, 사육사가 이 얼룩말을 노새처럼 꾸밀 사육사가 아니라는 것 등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다. 이 증거들은 p에 대한 증거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다. 따라서 드레츠키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나는 p가 q를 함축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p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근데 p에 대한 증거가 자동적으로 q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하므로 나는 q를 모르지만, p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인식적 닫힘 원리는 틀렸다.
모어와 드레츠키의 논박은 꽤나 흥미로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모어의 반박은 마치 회의주의 논변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드레츠키의 반박은 잠깐 멈칫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이 두 반박이 모두 데카르트의 회의주의 논변의 근원적 전제인 확실성 개념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착각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가 진리의 규칙으로서 제시한 의심의 원칙은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다면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만이 참된 것이라는 말이고, 이것이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의 토대를 정초했던 작업의 첫 결의였다. 확실성 관점에서 모어의 주장 ‘p를 알고 있기 때문에 q도 안다.’를 살펴보면, 모어는 의심할 여지인 q를 남겨두고 p를 알고 있다고 단정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드레츠키의 주장 중에서도 ‘나는 p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p는 알고 있다’라는 것은 p에 대한 의심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의심의 원칙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두 반박은 데카르트가 강조하듯, 명석 판명한 것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리 인식의 기준 관점에서 봤을 때,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한 논박으로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모어와 드레츠키가 위와 같은 주장을 내세우려면, 데카르트가 규정하는 진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진리의 기준을 먼저 제시해야 효력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고안해낸 의도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처음에는 희망을 가지고 탐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희망은 이내 절망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탐구자로서 그는 ‘나 자신은 존재한다.’는 자신의 자아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찾아내고, 신의 존재 증명을 거쳐, 이성이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임을 확신하게 되고, 이 선한 신으로부터 그의 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는데 대강 보았지만 이걸 생각해낸 그 순간 데카르트는 어떤 지적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도 안 간다. 이다음부터는 아무래도 희망의 등불 아래에서 철학을 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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